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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예수의 비유-2/ 탕자의 비유-더 큰 악 / 누가복음 15:11-32

 

01.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다. 2부작으로 되어 있다.

 전반부는 집으로 돌아 온 둘째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까지고 그리고 후반부는 그동안 잠잠하던 형이 더 큰 악으로 등장을 한다.  

 

02. 이 비유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는 이야기로 부터 시작한다. ‘뭐 비지니스를 하다 보면 아버지에게 미리 유산을 달라 할 수도 있겠다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당시 배경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당시 상속법에 의하면 부모의 유산은 부모가 돌아 가셨을 때 자식들에게 분배가 되었고 살아 계셨을 때 분배가 되었다 하더라도 돌아 가시기 전까지는 그 재산을 처분하거나 관할하는 일은 가장인 아버지의 몫이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그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유산을 달라 요청한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유산을 처분했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될 일이 일어난 거다. 그 당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중들은 당연히 분노하였을 것이다. “천하에 불효 막심한 놈 같으니라고!”

 

03.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은 아들의 요청 보다 더 충격적이다. 본문을 보니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 15:12)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여기서 살림은 헬라어로 비오스이다. 문자적으로는생명을 뜻한다. 목숨을 찢어 달라는 아들의 말도 안되는 요구에 아버지는 그대로 해 준 거다. 아버지의 사랑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이런 사랑을 하라요구한다. 어떤 사랑? 목숨을 찢어 주는 사랑! 조그만 말 한 마디로 견디질 못하고 그 상처 평생 울겨 먹는 우리인데 그런데 목숨을 찢어 주는 사랑을 하라 하신다.

 

04. 그렇게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난 아들, 그 유산을 갖고 잘 살았을까? 성경은 탕자가 흉년을 만났다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렇지.” 아마 다들 징계를 받아 마땅한 놈이라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성경에 흉년 기록이 많이 등장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대표적인 징벌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05. 흉년이 드니 먹을 것이 없다. 급기야 돼지 치는 일을 하게 된다. 오늘 우리 이민자들이야 워낙 험한 일을 많이 해 보다 보니 뭐 그까짓걸 가지고 하겠지만 당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중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돼지를 가장 부정한 짐승으로 여겼다. 심지어 탈무드를 보면 돼지를 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 다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아버지 유산을 가지고 멀리 떠났던 둘째 아들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혐오하던 돼지치 기가 되었다는 거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 놈은 돼지나 쳐야돼…’

 

06.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 조차 없어 돼지들과 함께 쥐엄 열매 쟁탈전을 벌였다는 거다.  쥐엄 열매는 가장 곤궁할 때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 마저 먹을 수 없었다는 거다.

 

07.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17절이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쥐엄 열매를 먹으며 비로소 그가 제 정신이 들었다는 거다. 물론 그가 스스로 돌이켰겠는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고선 설명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에겐 아니 우리 모두에겐 그렇게 스스로 돌이킬 실력과 능력이 없다는 거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람이 조금만 배고프면 돼지 우리를 찾지만 정말 배고프면 아버지를 찾는다했다. 종종 하나님은 우리의 자랑할 만한 것들을 가져 가신다. 그리고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들 하나도 남지 않게 하시고서는 하나님 찾게 하신다.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환경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신 거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간다. 이것이 회개다. 다시 돌아 오는 거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 오는 거다.  

 

08.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뉴올리언즈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소설을 영화화 한 건데 그 소 설에 등장하는 지명이 뉴올리언즈에 실제 존재하는 지명들이다.

 

주인공인 블랑쉬(비비안 리가 주연을 맡았다)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Elysium Field 다시 말해 낙원으로 가길 원했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낙원이 아닌 Cemetery 곧 묘지였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우리는 달리고 또 달리지만 그것의 끝은 결국 Cemetary(묘지)임을 다시 말해 욕망의 끝은 무덤이요 죽음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의 끝은 Cemetary라 는 거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떠났던 둘째 아들은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 온다.

 

09. 한편 아들이 집을 나갔다.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났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목놓아 기다린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돌아 오는 거다. 보통 아버지였다면 어땠을까? 여기가 어디라고 무슨 낯짝이 있어 돌아 왔냐고 당장 나가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뛰어 나갔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춘다.

 

10.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1662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오늘날 최고의 성화로 평가 받고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고 있다. 헨리 나우엔도 렘브란트의 이 그림을 보고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라는 책을 지었다.

 

램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를 보면 한 노인네가 헐벗은 거지 모습의 청년을 감싸 안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다. 아버지 앞에  무릎을 끓고 두 손을 조아리고 있는 작은 아들의 빡빡 깍은 머리, 헤어진 옷, 그리고 망가진 신발에서 그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11. 헨리 나우엔은 말힌다. “눈물 없는 자비란 있을 수 없다.” 이 그림에서 아버지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이 멀었다. 매일 같이 아들이 돌아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두 눈이 짓물러 멀게 된 아버지의 눈….. 아들은 돈에 눈이 멀고 여자에 눈이 멀고 세상에 눈이 멀었지만  아버지는 사랑에 눈이 멀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시력을 상실한 아버지의 두 눈은 우리를 목말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대변해 준다. 렘브란트의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부끄럽기 그지 없다. ‘눈물을 흘리며 기다리다 기다리다 눈이 멀 정도로 나는 그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해 본적이 있는가? 나는 그 누군가를 그렇게 용서해 본적이 있는가?”  

 

12. 그래 맨하탄에 있는 Redeemer Church의 팀 켈러 목사는 탕부 하나님이라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흔히 탕자로 번역되는 문구의 형용사 prodigal제멋대로 군다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라는 뜻이다.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쓴다는 의미다아들을 위해 사랑을 탕진하시는 하나님! 앞뒤 재지 않고 아낌 없이 다 내주시는 하나님! 그래서 Prodigal God, 탕부 하나님이라는 거다.  

 

13. 이제 2부다. 전반부의 주인공이 작은 아들이라면 후반부의 주인공은 큰 아들이다. 우리는 그동안 작은 아들만 탕자로 생각해 왔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은 평생 아버지 속 썩인 일 없이 묵묵히 아버지 곁을 지켜 왔다. 본문의 정황만으로 보면 그야 말로 착한 형이었다. 그런데 후반부를 보며 우리는 형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착한 형!, 그는 요나서 식으로 말한다면 더 큰 악이었던 거다.  

 

14. 동생이 돌아 왔다. 아버지 입장에선 경사가 난 거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 온 거다. 버선 발로 뛰어 나가 껴안고 잔치를 베풀어 준거다. 그런데 형은 이것이 못마땅한 거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 마음에 근심을 끼친 적도 없고 아버지 곁을 떠난 적도 없는데 그렇게 아버지 속 썩이며 떠났던 동생이 돌아 왔다고 그렇게 환대 하니 그럼 나는 뭔가?  아버지 앞에 무릎 끓고 석고대죄를 드려도 모자랄 판인데 그를 위해 잔치를 베푸신다니….

 

형은 아버지의 자비가 못 마땅한 거다. 요나서는 이런 형의 모습을 더 큰 악’( 4:1 / 직역)이라 말한다. 니느웨의 죄는 그냥 이지만 니느웨를 향한 아버지의 용서가 못 마땅한 요나를 가리켜 성경은 더 큰 악이라 한 거다.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이 못 마땅한 그대, 그대가 바로 더 큰 악이다라고 말이다.

 

15. 병원에는 의원병(iatrogenic)이 있다고 한다. 지병을 치료하러 갔다가 치료 중에 더 심한 병에 걸리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란다. 마찬가지로 유진 피터슨은 비유로 말하라라는 그의 책에서 이를 <경건병(eusebeigenin)>이라 명명한다. 라어로 유세비아”(eusebeia)거룩한, 경건한, 독실한이라는 뜻이다. 거룩한 사람, 하나님 앞에서 온통 신앙과 순종으로 사는 사람 즉 의로운 사람(righteous)이라는 뜻으로 오직 경건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지을 수 있는 역설적인 죄라는 거다.  

 

16. 아주 오래 전에 영화 아마데우스 볼프강 모짜르트를 보았다. 살리에리는 그렇게 무절제한 모짜르트, 약혼 까지 한 상태에서 온갖 방종을 일삼는데도 징계는 커녕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늘 못 마땅하다. 그가 변한다. 무섭게 변한다.

 

17. 요나서의 메세지도 그렇다. 차준희 교수는 <열두 예언자의 영성>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니느웨 백성의 회개에 하나님도 심판의 뜻을 돌이키셨다. 그런데 오히려 이 일로 인해 돌아 버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주인공 요나다. 요나는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시기로 한 하나님께 대해 분노하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요나는 연민 보다 열정이 많았다. 세상을 사랑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병든 세상을 한 번 시원하게 쓸어 버리고 다시 시작해 야 한다는 생각이 더 많았다. 우리는 남을 향해 날카로운 정죄의 칼을 휘둘러 대는 일을 조심해야 한다. 의로운 분노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 수 있다.”

 

18.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5장엔 세가지 비유가 나온다. 잃은 양의 비유와 열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  이 세 비유 다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 100, 10, 2 점점 초점이 좁혀진다. 그리고 이제 하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바로 남아 있는 형에게 쏠려 있다. 그래도  형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찰나, ‘너는 더 큰 악이란다.

 

교회 안에서 기도한다고, 나름 열심히 하나님 섬기고 있다고 기고만장하지 말라. 나만 모르고 있다. 내가 <더 큰 악>이었다고 말이다.

 

19. 세상엔 하나님을 떠난 둘째 아들로 득실 거린다. 교회에 안 돌아 온다. 교회 안의 착한 형들 때문에 안 온다. 기도하는 나, 열심을 내어 뭔가를 하려는 나, 그저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던 나! 그런데 그런 내가 더 큰 악이었다는 것, 그것! 우리 알아야 한다. 회개하자. 돌이 켜야 할 것은 동생이 아니라 바로 .

 

 

2018년 5월 18일(금요일) 

퀸즈 중앙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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